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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왕석 전 교수     ©경인신문

칼 마르크스는 인간과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을 집중했던 사회혁명가였다. 그가 포착했던 중요한 중심문제 중의 하나는 사람의 의식에 대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계급간의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문제가 그것이다.

 

이 간단한 문제가 이후 인류에게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차별화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두 번째 문제인 사회발전에 사람의 생각이 왜 중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르크스는 사회변혁과 혁명의 중요한 요소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중요한 말을 남겼다. 매우 중요한 말이다. 좀 난해하기는 하지만 간결하게 축약해 보면 사회적으로 높은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무서운 통찰력이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포착력이다. 경제학자이며 역사학자, 혁명실천가가 인간심리와 정신의식을 이렇게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현대에 와서 이 통찰력은 더 빛을 발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지배계급들의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한 의식 활동 때문에 노동자, 도시빈민, 최저생계자, 농민 등의 피지배 계급도 자신들의 계급적 의식을 자각해 스스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를 앞에 놓고, 조국장관 임용에 관한 문제를 놓고 생각해 보면 웃지 못 할 아이러니가 포함되어 있다.

 

보통은 국민들은 누가 장관이 되든 별 관심이 없다. 대통령의 권한이고, 대통령이 알아서 잘 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국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이나 뉴스를 확인한다. 눈 뜨면 계속해서 장관후보 가족 주변사람들 관련 사건정보가 이어지고 있다. 법무부 장관이 되어야 할 사람이 끊임없이 사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관심 반, 호기심 반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학생들을 자녀로 둔 학부모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다. 간혹 사람들은 법은 이 사회의 최후의 보루라 한다. 최후의 보루라는 이 표현에서 우리는 무었을 느끼게 된다. 어떤 것인가? 절박함이나 간절함 같은 것이다. 법 앞에 마지막 공정과 평등과 정의를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정의란 무엇이겠는가? 가진자, 권력자, 지위가 높은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정의를 요약하라면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정의란 이 사회의 최대의 약자에게 최고의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사회이며,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란 이 사회의 최약자인 노동자, 도시 빈민, 최저 생계자와 생활 궁핍자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정의와 정의로운 사회가 규정된다면 사법개혁의 방향성은 더욱 분명해 진다. 약해서, 배우지 못해서, 물려 받은게 없어서, 교육 받지 못해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는 계층 편에 서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고 정의이며 혁명이다.

 

뉴스를 보고 오랫동안 멍해진 머리 속에 찾아드는 것 한 귀절 언표가 떠오른다. “권력자, 재물 소유자,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자들의 지배계급의 의식은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다”라는 말이다. 그들은 결코 사회정의와 약자 편에서 결코 일하지 않는 다는 마르크스의 일침은 한 사회를 넘어 역사의 교훈이다. 그가 왜 역사 속의 혁명에 뛰어들었는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약자들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개혁과 변혁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저미고, 아프게 한다. 오늘 저녁은 더 깊은 명상을 해야 할 것 같다.

 

중앙대학교 김왕석 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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