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당시 확보된 비석건립 사업예산 2천만원 어디로 갔을까???

 ▲죽산면 (당시 이죽면) 죽산리주민이 장원리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투옥됐다.   자료(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죽산면 (당시 이죽면) 죽산리주민이 장원리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투옥됐다.   자료(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경인신문= 박우열 기자] 안성은 1919년 3월 11일 당시 양성공립보통학교, 지금의 양성초등학교에서 처음 만세시위가 전개된 것을 시작으로 읍내와 죽산지역 등으로 전파되며 큰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다.

안성시는 순수 민간주도의 만세운동으로 일제식민통치기관을 완전히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을 이룩한 안성 4.1만세운동의 역사를 널리 알리고 선열들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후세들에게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양성면과 원곡면을 잇는 성은고개(만세고개)에 지난 2001년 3.1운동 기념관을 건립한 후 매년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안성지역은 비록 이틀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민들의 힘으로 실질적인 해방을 이루어낸 3.1운동의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다. 더욱 분명한 것은 양성·원곡면은 물론 읍내나 죽산 지역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던 항거사건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죽산지역은 양성·원곡면 등 지역의 그늘에 가려 1919년 4월1일부터 3일간에 걸쳐 2천여 명의 애국 면민들이 만세운동을 펼친 역사적 고장이고 기록에도 확인되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와 관련된 기념행사는 물론 그 흔한 기념비조차 없다.

1919년 4월 당시 죽산지역 주민들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다. 이에 후손들은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까지 독립을 포기하지 않았던 선열들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비석이라도 세워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 했지만 행정기관은 요지부동이다.

특히 지난 2019년 당시 우석제 시장은 이 같은 주민들의 민원을 수용해 비석을 세워주기로 하고 2천만원의 예산을 세웠지만 우석제 시장이 중도 하차하자 비석을 세우려던 사업은 결국 유야무야 (有耶無耶)됐으며 당시 확보됐던 2천만원의 행방도 어디로 갔는지 정확한 사용처를 알 수가 없다.

죽주문화보전회 윤민용 회장은“당시 죽산지역은 수천여명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펼쳤고 일본경찰의 발포로 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한 기록이 있다”며,“죽산지역은 여느 지역 못지않은 만세운동을 펼친 애국지사들의 고장이지만 안성시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눈앞의 총칼이 두려워서 시키는 대로 살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이름도 나라도 잃고 살아갔을 것”이라며, 죽산지역 민간주도 만세운동을 자랑스럽게 전했다.

또 죽산지역의 만세운동으로 진촌리와 장원리, 죽산리, 두현리, 장계리, 매산리, 용설리, 장릉리와 일죽면의 상북리, 당촌리, 화곡리, 송천리, 장암리, 주천리 등에서 26명의 주민들이 붙잡혀가 징역과 태형 등의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도 선열들의 업적이나 이름 석 자 적힌 비석하나 없어 죽산지역 후손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죽주문화보전회 회원들은“전국을 통틀어 당시 2천명 이상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외친 면단위는 거의 없다”면서,“죽산지역 후손으로서 독립애국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에게 애국애족의 뜻을 전하기 위해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자 수년간 노력했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움과 소외감을 전했다.

죽산지역(일죽, 죽산, 삼죽)후손들은 매년 3.1운동 기념관에서 4.1만세항쟁 기념식이 열리는 4월이면 선열들에 대한 죄스러움에 한숨소리만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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