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경인신문=김신근 기자]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중앙회가 있는 용인 특례시는 조선 후기  『훈민정음』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큰 업적을 남긴 실학자 유희(柳僖)가 출생한 곳이다.

용인특례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에서 출생하여 영조 대에서 헌종 대까지 살았던 학자로 일찍이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鄭東愈 1744~1808)를 직접 사사하여 당대의 문자 음운학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어 『훈민정음』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유희는 역산(曆算)과 율려(律呂)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특출하고 총명하여 4세에 한자의 뜻을 알고, 7세 때 《성리대전》을 통독하였다. 그러나 11세 되던 해에 아버지 유한규(柳漢奎)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13세에 이미 시부(詩賦)를 짓고, 구장산법(九章算法)을 이해하고 15세에 역리복서(易理卜筮)를 꿰뚫었으며, 《서전(書傳)》《사기(史記)》 및 경학에 잠심하여 성리학을 주로 하고,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본으로 삼아 경서의 주석에 전념하였다. 

18세 되던 1791년(정조 15)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향촌에 묻혀 농사지으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농정, 충어, 종수, 조류, 풍수 등 자연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저술에 반영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연구는 《문통(文通)》이라는 저서에 담겨 초고본 100권이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고, 따로 1824년에 저술한 《언문지(諺文志》와 《시물명고(詩物名考)》및《물명유고(物名類考)》가 남아있다.

그중에서 특히 《언문지》는 30세 전후에 저술한 원고를 분실하고, 20여 년이 지난 1824년 52세에 다시 저술한 것이 지금에 전하는데, 이 책은 『훈민정음』의 된소리 표기에 각자 병서를 써서 ㅸ ㅹ의 설정과 ㅿ ㆁ ㆆ의 설정을 제시하였으며, 하늘아( · )의 음가를 ‘ㅏ, ㅡ’의 중간소리[간음(間音)]라 한 것과 사이ㅅ 표기 등의 주장과 함께 국어에서 사성(四聲)이 필요 없다고 함과 동시에 입천장 소리되기[구개음화(口蓋音化)]에 관련한 탁견은 우리 국어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언문지》의 유씨교정 초성·중성·종성 41 자모를 보면, 당시 쓰이지 않는 글자가 상당수 채택되었고, 종성에는 ㅅ이 폐기된 내용이었다. 즉, 그것은 당시의 문자 음운학이란 당시의 한자음을 현실적이고 이상적으로 표기함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표기되는 글자 수 1만250개는 사람이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소리로서 초성례·중성례·종성례·전자례의 4부로 구성되어 훨씬 체계적인 논술이었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문자구조가 정교하고 표음문자로서 훌륭함을 정확히 설파하며, 『훈민정음』에 대한 천대를 한탄한 것은 후대의 학자를 기대하는 뜻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의 『물명유고』는 그 섬세한 기술과 희귀한 어휘 등으로 당시의 다양한 국어어휘 7,000여 물명을 수집하여 해박하게 주석한 물보류(物譜類)로서, 그 주석에 쓰인 우리 어휘는 무려 1,600개가 넘어 가히 그의 대표적 저술로 손꼽을 수 있으며, 그를 어휘학자로 평가되게 한 명저로 전한다.

이처럼 유희는 신경준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음운학자로 평가되지만, 《언문지》에서 『훈민정음』의 기원을 몽고문자에 두어, 세종대왕의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훈민정음 창제 정신을 왜곡한 점은 옥에 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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