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경인신문=김신근 기자] “세종 28년에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훈민정음은 그 예(例)가 반절(反切 두 한자의 음을 반씩만 따서 한 음으로 읽는 방법)의 뜻을 취했고, 그 모습은 서로 바꾸면서 1배(倍)를 보태는 법을 사용했다. 그 글은 점과 획이 매우 간단하면서도 맑고 탁하고, 열리고 닫히며, 초성, 중성, 종성이 찬연하게 갖추어져서 마치 그림자처럼 보인다. 그 글자가 많지 않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매우 세밀하여 쓰기가 매우 편하고, 배우기도 매우 쉬우며, 천만 가지 말들을 다 표현할 수가 있다. 비록 여성이나 아이들이라도 모두 사용하여 글로 표현하고 정을 통할 수가 있다. 이것은 옛 성인(聖人)이 미처 연구하여 만들지 못한 것이고, 온 천하를 통틀어도 없는 것이다.

여러 나라가 쓰는 문자가 있지만, 모두가 어지럽고 보잘것없는데, 훈민정음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그 혜택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 성음(聲音)의 대전(大典)이 될 만하다. 그래서 성인께서 만든 뜻이 정미하고도 깊지만, 당시 유신들이 해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후세의 백성들이 날마다 쓰면서도 모르고 있다. 성음의 이치가 밝지만 앞으로 다시 어두워질 것이다. 나같이 천한 사람이 어찌 감시 그 심오한 이치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겠느냐마는 좁은 구멍으로 엿보고 추측하여 이 도해를 만들어 놀이에 붙이고자 한다. 그저 잊지 않겠다는 뜻만 있을 뿐이다.”

윗글은 조선시대 영조 때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1780)이 그의 저서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의 후반부에 첨가한 <훈민정음도해서(訓民正音圖解序)>라는 글을 통해서 밝힌 심경이다. 

그런데 신경준이 《훈민정음운해》를 집필을 할 때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고서 자신의 주장을 편 것인지, 아니면 그 책을 보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그의 저서에서 확인한 신경준의 해석은 소옹(邵雍)의 성운해(聲韻解) 이론에 너무 집착하여 음성학의 측면에서는 진보한 것이 많지만, 정작 훈민정음의 고유한 문자적 특성을 밝히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기에《훈민정음 해례본》과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도 있지만, 오히려 후퇴한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도해 서문은 훈민정음 창제 약 3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정확히 서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을 성인(聖人)으로 평가하면서 최고의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 “당시 유신들이 그 심오한 이치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했다”라고 한 말이 해례본의 미흡함을 지적한 것인지, 아니면 정인지 등이 쓴 서문이 미흡하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신경준은 신숙주의 막내아우 신말주의 10대손이므로 세종대 이후 훈민정음을 연구한 조선 시대 학자 중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밖에도 신경준과 비슷한 시기의 실학자 이사질(李思質 1740∼1794)은 ≪훈음종편(訓音宗編)≫이라는 글에서 훈민정음 제자의 원리에 대한 의견을 적었는데, 전 세계의 어마어마한 화제를 몰고 왔던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 □, △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글이기에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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