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경인신문=김신근 기자] 조선의 네 번째 왕에 의해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의 문자 『훈민정음』에 대해서 모화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 시대 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왜냐하면, 훈민정음 창제 과정이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창제 자인 세종이 그 제자원리를 직접 글로 쓴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그 ≪해례본≫마저도 훈민정음이 창제된 1443년 음력 12월로부터 497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났기 때문이다. 

후대 조선 시대 학자들은 훈민정음의 독창성과 과학성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천재성을 극찬하면서 성인이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선 시대 학자들의 한계였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연구한 조선 시대 학자들을 통해서 훈민정음이 왜곡되고 있는 원인을 찾아보는 실마리가 될 것 같아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훈민정음 창제 후 시대순으로 학자를 살펴보면 먼저 성종 때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을 들 수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집필자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같은 항렬의 먼 족척인 그는 ≪악학궤범≫과 ≪용재총화(慵齋叢話)≫라는 명저를 남겼는데 ≪용재총화≫ 권7의 기사에서 훈민정음이 범어(梵語) 즉 산스크리트를 모방했다고 주장하고, 세종이 언문청(諺文廳)을 만들고, 성삼문, 박팽년 등을 시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언문청은 세종 28년(1446) 11월 8일에 설치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건대, 훈민정음 반포된 뒤에 만든 것이라 맞지 않고, 성삼문, 박팽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쓰는 데 참여했을 뿐이다. 더욱이 범어를 모방했다는 말도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문자 모습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신뢰하기 어렵다.

다음 학자는 조선 시대 중국 성운학자인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이다. 중인 출신이었지만 능통한 중국어와 이문 실력 때문에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통역을 담당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던 그는 40여 년간에 걸쳐 17종의 저작물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훈몽자회(訓蒙字會)≫는 아동들에게 한자의 음과 뜻을 실물을 통하여 정확히 가르치기 위하여 훈민정음 자모음의 이름을 처음으로 작명한 학자이다.
 
한편,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격찬한 학자는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였던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세종이 만든 언서(諺書)는 만든 글자가 교묘하고 충실하여 이것이 만들어진 뒤로 세계만방의 어음(語音)이 통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성인(聖人)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세종을 성인(聖人)으로 칭했다.

또한, 숙종 때 수학자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훈민정음의 문자구조와 발음구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로 ≪경세훈민정음(經世訓民正音)≫을 저술하여 중국 송나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의 성음(聲音)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별자리 28수(宿)의 형상을 따랐다고 해석하면서, 특히 초성의 5자 음은 오행의 원리를 따랐고, 중성 11자는 태극, 음양, 팔괘의 모습을 따랐다고 해석했는데, 이 해석은 소옹의 상수역학(象數易學)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을 연구한 탓에 제자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최석정 이후 훈민정음을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는 영조 때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1780)으로 그는 ≪훈민정음도해서≫라는 글에서 훈민정음의 가치를 범세계적인 문자의 모범이라고 격찬하고, 그런 문자를 만든 세종을 성인(聖人)으로 평가하면서도, 당시 유신(儒臣)들이 그 심오한 이치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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