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경인신문=김신근 기자] 세종 28년은 1446년이다. 그해 9월 29일 자 《세종실록》에 “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임금이 쓴 어제가 보이고, 그 뒤에 예조판서 정인지 등이 쓴 서문이 실려 있다.

그런데 3년 전인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자 《세종실록》에 이미 훈민정음이 창제된 사실을 발표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정인지 · 권제 · 안지를 시켜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1445년에 완성하였다.

이 기간에 《운회》를 언해하고, 아전들에게 언문을 가르쳐서 행정실무에 이용하도록 하는 등 세상에 이미 다 알려진 ‘언문’ 곧 ‘훈민정음’을 새삼스럽게 어제와 서문, 그리고 해례를 발간하여 1446년 다시 반포한 것을 무슨 까닭인가?

그 답을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즉, 정인지 서문의 끝에는 서문을 쓴 날짜가 정통 11년 9월 상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통(正統)’이란 단어는 바른 계통, 정당한 혈통 또는 사물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서문의 정통은 명나라 영종 황제의 연호이고, ‘상한(上澣)’은 당나라 때 관리에게 열흘마다 하루씩 목욕 휴가를 준 데서 유래한 말로 ‘상순(上旬)’이라는 의미와 같이 매월 초하루부터 열흘까지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세종실록의 9월 29일 자의 훈민정음 발표된 날짜보다 20여 일 전에 집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위대한 문자 훈민정음을 이토록 3년 만에 창제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실마리는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명나라 황제의 권력이 막강하여 조선을 크게 압박하는 상태에서 조선만의 문자 창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차동궤 서동문(車同軌, 書同文)’의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는 ‘수레가 달리는 궤도가 서로 같고, 같은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정치제도와 문자 생활이 서로 같은 나라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조선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다면 이는 명나라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오해받을 위험이 매우 컸다.

그러다가 세종 17년(1435)에 명나라에서 가장 약한 황제가 등장한다. 바로 9세 어린 나이에 6대 황제로 등극한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로 그는 명 왕조 사상 첫 복위를 한 황제인데 정통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복위 후에 천순(天順)으로 개원하였으며, 어머니 태후가 섭정했다.

세종은 바로 이때를 새로운 조선의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는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기회로 포착한 듯하다. 그래서 이미 28세로 장성한 세자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넘기고 훈민정음 창제에 몰입하려고 하자 세자의 대리청정을 극구 반대한 신하들에게 세종 24년(1442년) 8월 23일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경들은 자세하고 세밀한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갓 유자(儒者)의 정대(正大)한 말만 가지고 와서 아뢸 뿐이다.”[卿等 未知詳密之意 徒將儒者正大之言 來啓耳]

여기서 임금이 “자세하고 세밀한 뜻을 경들이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은 명나라에 어린 황제가 등극했으니 그가 장성하여 친정을 하기 전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기회를 놓칠 수 없으므로 세자의 대리청정을 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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