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박재성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한문교육학박사

[경인신문=김신근 기자] 특허청에서는 2017년 개청 40주년과 발명의날 52주년을 맞아 ‘우리나라를 빛낸 발명품 10선’에 대한 온라인 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훈민정음이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훈민정음의 독창성과 위대함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들어가보면 우리는 훈민정음에 대해 모르는 내용이 너무 많다. 
훈민정음 전문가인 박재성 (사)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에게 우리가 잘 모르는 훈민정음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경인신문 편집국]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이 기록처럼 과연 세종대왕이 혼자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을까? 이 질문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의문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임금이 친히 창제한 훈민정음이라는 엄청난 문화적 업적을 대서특필해도 부족할 터인데,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기사에 두서너 줄로 간단하게 소개한 것 때문에 의문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세종실록의 기록처럼 세종 재위 25년 12월 30일에 만들어졌을까? 그것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해에 시작할 언해 사업을 염두에 두고 그 전에 이미 만들어 놓고서 그 발표 시기를 연말에 맞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12월 한 달 안에 만들었다고 한 것도, 임금이 그동안 이 일 때문에 정사를 소홀히 했다는 인상을 신하들에게 주지 않기 위한 연막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에 열성적으로 몰입했던 시기는 재위 23년 무렵으로 임금과 몇 사람의 조력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통같은 보안 속에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 창제 작업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밀실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훈민정음을 반포한 뒤에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이 “신하들과 의논도 하지 않았다.”라고 상소문에서 언급한 점을 들 수 있다. 

만약 집현전 관원들이 공개적으로 조력하였다면, 집현전 실무책임자였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집현전 최상위층 보수파들이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고, 만약 그들이 알고 있었다면 훈민정음이 창제되기도 전에 이미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 집현전 학사들이나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이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도움을 청한 조력자들은 누구일까? 그 조력자들을 구할 때 가장 중요시한 선발기준은 비밀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조력자는 벼슬아치가 아닌 대군과 공주뿐이다. 이들과는 비밀리에 만날 수 있고, 또 조력할 만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에게는 8명이나 되는 대군과 한 명의 공주가 있었다. 대군 가운데 여섯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일곱째 평원대군(平原大君), 여덟째 영응대군(永膺大君) 등 3명은 어려서 조력자가 될 수 없고, 또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은 학문이 부족하고 말썽을 많이 피우는 처지여서 조력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나머지 네 명의 아들 중 첫째는 왕세자로 이미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기도 하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에는 오히려 서연관으로부터 훈민정음에 관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아 훈민정음 창제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들인 둘째 진양대군(晉陽大君)과 셋째 안평대군(安平大君) 그리고 다섯째 광평대군과 둘째 딸 정의공주인데, 진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세자를 도와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조세제도 개혁과 각종 편찬사업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공직을 맡고 있어서 적극 참여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다섯째인 광평대군과 정의공주를 조력자로 지목하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머리가 영특하고 학식이 풍부하였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이 부왕인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조력자라는 단서를 다음의 사료를 근거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할 무렵부터 전무후무하다 할 정도로 정사를 소홀히 하면서 온양, 이천, 청주 등 온천장을 거의 해마다 다녀왔다. 그런데, 이 기간에 임금의 궁 밖 출입에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종 23년에 여러 자녀 가운데 출가외인이었던 27세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17세인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궁 밖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바깥출입을 할 때는 반드시 그 이유가 기록되는데, 하루 안에 다녀오는 경우 ‘거둥’으로 기록되고, 며칠간 머무를 때는 ‘이어(移御)’라고 하며 이유가 없이 다녀왔다면 그것은 ‘밀행(密行)’이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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