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아 세계시민선언 공동대표

[경인신문=이설아 세계시민선언 공동대표] 기본소득이 소득 역진적 정책이라는 이야기가 왕왕 나온다. 살만한 중산층에 자산을 더해줘 소득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기본소득의 원 취지를 잘못 이해한 비판 아닐까? 기본소득은 저소득층에게 최저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소득 격차가 심화될 수 있어도, 삶의 최저선을 지키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성공한 정책이다.

지난 겨울, 또래의 한 승무원이 자살한 일을 아직 기억한다. 유수 항공사에 재직하던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10개월 째 지속되며 강제 휴직 상태로, 가스와 전기마저 끊어진 방에 살고 있었다. 만약 '선별복지'를 우리가 고수하지 않았다면, 보편지급을 당장 실현했다면 그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을 지 모른다. 선별복지의 틀에서 그는 지원대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각의 틈에서 그는 마지막 도움을 받지 못했다.

몇 년 뒤의 큰 보상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보다, 당장 내일의 먹고 자는 일이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극단적 가난'은 선별복지로 전수지급 할 수 있지 않냐고 물을 수 있지만, 복지에는 항상 사각이 있고 또한 선별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복잡하고 최소 몇 달이나 소모된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라는 점이 항상 좌시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도는 짤방 중 그런 만화가 있다. 도토리를 잃어버렸다고 훌쩍거리는 다람쥐에게 여신이 말한다. 네가 잃어버린 도토리는 몇 년 뒤 커다란 도토리 나무가 돼 모두를 살찌울 것이라고. 그러나 다람쥐는 답한다. 다람쥐는 그 때까지 살 수 없고 당장 눈 앞의 도토리가 소중하다고. 모두 거시만을 바라보느라 사람들 개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데는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에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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