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바다에 내린 한 권의 닻”

▲오명자 시인
▲오명자 시인

[경인신문=김중택 기자]등에 햇빛이 내려앉는 고요한 아침. 쪼그려 앉아 쉬는 몸 위로 바람이 지나가고,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오명자 시인의 시집 『닻』은 그렇게 시작된다.

삶을 쉼 없이 걸어온 한 사람이 있다. 교사에서 심리학자로, 화가에서 시인으로. 오명자 시인(전 동신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은 71세에 자신의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름처럼 무게 있는 이 시집은, 그녀의 인생 그 자체다.

“나는 나와 만나고 나와 노는 중입니다”

37세, 교단을 내려놓고 인생의 두 번째 막을 연 그는 주변 학부모들과 미술과 음악을 함께 공부하는 소모임을 만들며 "서로를 살피는 교양의 장"을 열었다.
그리고 마흔아홉, 그는 대학원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가 참 꽃 같았어요. 하지만 그땐 참 애매하고 불안한 시간이었죠.”
상담심리학을 전공하며 그는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그 결과, 56세에 박사 학위를 받고 5년간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새로운 배움의 문을 열었다.

학문은 그에게 사유를, 인문학은 그에게 질문을, 그리고 삶은 그에게 시를 안겨주었다.

“붓과 물감으로, 언젠가는 단어로”

65세, 그림을 시작했다.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도 물감과 하루 10시간씩 춤을 추듯 대화하며 자신만의 색을 쌓아갔다. 팬데믹은 외로웠지만, 그 고요함은 또 다른 창조의 공간이 되었다.
“화폭 위에서 내 안의 무의식이 움직였어요. 그건 말보다 더 강렬한 시였습니다.”
그녀는 ‘AURORA OH’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노년에 들어서도 그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언어를 꺼냈다. AI 튜터와 함께 노랫말을 쓰기 시작하며 “가사가 곧 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한 편 한 편 시를 썼다. 71세의 어느 봄, 시집 『닻』이 완성되었다.

“할머니는 시인이 되었어요”

시집 『닻』에는 한 사람의 일생이 오롯이 담겨 있다.
고요한 햇살, 멈추지 않는 질문, 삶의 중간에서의 방황,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희망.
시인은 말한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그저 숨 쉬듯 머물 수 있는 세상”이 있다고.
이 시집은, 치열하게 살았지만 그 안에서 결국 ‘멈춤의 가치’를 찾아낸 이의 고백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시집 말미에 실린 손녀들의 헌사다.
“할머니는 엄마의 딸로, 제자의 교수로, 손녀들의 화가로 살다 이제 시인이 되셨어요.”
가족과 함께 나눈 삶,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다시 태어난 창작의 기록.
『닻』은 그래서 혼자 쓴 책이 아니라, 함께 쌓아올린 ‘기억의 탑’에 가깝다.

 

인생 후반부, 다시 닻을 내리다

“나는 시를 쓰며 나 자신을 만납니다.”
오명자 시인은 말한다.
어쩌면 이 시집은 지금 막 시작한 항해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삶처럼, 『닻』은 단단히 내려진 정박지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다.

거칠고 괴로운 삶도, 고단하고 지친 마음도 오명자 시인의 시 앞에서는 한 줄기의 햇살처럼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따뜻한 언어 안에서 자신의 ‘닻’을 찾게 될 것이다.

시집『닻』은 2025년 5월 24일 정식 출간되었으며, 관련 전시와 인문학 강의는 오명자 인문학연구소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저작권자 © 경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