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일 밴쿠버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은메달을 딴 모태범이‘두 번째 메달’이라는 뜻으로‘V’자 사인을 그리고 있다. © 인터넷서울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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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문 천홍석기자] 23등 하고도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 놀듯이 경기 즐기고 결과는 '쿨'하게
장기자랑땐 막춤 춰도 훈련땐 자신에 엄격
"23등 하고 즐겁게 인터뷰하는 선수는 저밖에 없을 거예요."
이상화(21·한체대)는 19일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1000m에서 출전선수 36명 중 23위를 했다. 500m에서 금메달을 딴 지 이틀 만에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와 저만치 아래로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도 시종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1000m는 제 주종목이 아니잖아요. 그동안 제일 잘한 게 7등이었는데요 뭐." 자신이 집중한 500m에서 목표를 이뤘기 때문에 1000m의 부진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달력의 500m 경기일(16일)에 동그라미를 치고 '인생 역전!'이라고 적어놓아 화제가 됐던 이상화는 '이제 인생이 역전된 것 같으냐'는 질문에 "(인생) 한방 아녜요?"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노력과 그 대가에 대한 자부심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G세대 스포츠 선수들은 자신을 위해서 운동한다. G세대 선수들은 알아서 땀 흘리고, 또 그 결과를 '쿨(cool)'하게 받아들인다.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김관규 감독은 "이젠 억지로 운동시키는 시대가 아니다. 선수가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쪼아도 안 된다"고 말한다. 앞선 세대들이 설움과 고통을 꾸역꾸역 삼켰다면, G세대는 한바탕 놀이하듯 경기를 즐긴다.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금메달리스트인 모태범(21·한체대)은 왼쪽 귓불에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모양의 피어싱을 하고 양쪽 팔목에는 불교 신자라며 염주를 차고 다닌다. 묘한 패션이다. 얘기를 하는 시간의 절반쯤은 머리 모양을 다듬는다. 폴크스바겐 골프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어떤 연예인이 무슨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지 좍 꿰고 있을 만큼 차에 관심이 많다. 장기자랑 때에는 코미디언처럼 막춤을 추고, 클럽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훈련 스케줄만큼은 자신에게 한없이 엄격한 딱 부러진 면모를 지니고 있다.
| ▲ 14일 밴쿠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에서 성시백(맨위 사진 오른쪽)은 이호석에게 밀려 넘어져 아깝게 은메달을 놓쳤다. 그래도 그는 이튿날 경기장에 찾아와 위로하는 어머니(가운데 사진 왼쪽) 앞에서 밝게 웃었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18일 선수촌에서 열린 생일파티 때는 환한 미소를 띤 채 동료들과‘얼굴에 케이크 크림 바르기’같은 장난을 쳤다(/이은별 선수 미니 홈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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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세대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누가 시키기 전에 스스로 목표를 세우는 열정이 있다. 쇼트트랙 2관왕 이정수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양 발목에 1.5㎏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5㎏ 무게의 납 조끼를 입고 링크를 50~60바퀴씩 도는 강훈련을 소화하면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이상화는 어렸을 때 아무리 피곤해도 "스케이트 타야지"라는 부모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메달을 못 땄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하지도 않는다.
성시백(23·용인시청)은 14일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동료 이호석과 충돌해 눈앞의 메달을 놓쳤다. 그는 나흘 뒤인 18일 선수촌에서 생일파티를 했다. 그가 여자팀 김민정(25·전북도청)과 서로 얼굴에 케이크 크림을 묻히려고 한바탕 씨름을 하며 웃는 사진이 이은별(19·연수여고)의 미니홈피에 떴다. 성시백은 사흘 후(21일) 남자 1000m에서도 결선 진출에 실패해 메달을 놓쳤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위로하는 부모님을 오히려 웃으며 다독이는 건강한 청년이다. 성시백은 남은 500m와 5000m 계주에서 평소처럼 경기 자체에 몰입한다면 메달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믿고 있다. 전재목 코치는 "성시백이 스스로 부진에서 벗어나도록 맡길 작정"이라고 했다.
지도자들은 이제 더이상 선수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하지 않는다. 과거처럼 '헝그리정신'과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선수를 다루는 지도자는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변화된 환경 속에서 어느샌가 세계 수준에 성큼 다가선 G세대 스타들이 줄지어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스포츠 영역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에 거센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