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가슴에 묻은 화가...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108번지. 네비게이션도 헤메는 하늘아래 첫 동네에 둥지를 튼 김명수 화백의 작업실을, 32도를 넘나드는 삼복더위 '中伏' 날 물어물어 찾아갔다.

집안으로 안내하는 김화백의 부인(이옥자여사)에 안내에 따라 작업실로 들어간 필자는 그의 평범하지 않았던 지나간 과거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자칫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작품들이 시선을 끌었다.
부부 단둘이서 살고 있는 집안에 모든 사물들은 필자 눈에는 모두 예술작품으로만 보였다. 그렇게 넉을 잃고 있을 때, 이웃집아저씨 같은 푸근한 모습의 집주인을 만날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괴짜화가 김명수 화백이다.

그후 40년 가까이 온갖 수난을 당하며 태극기를 작품과 가슴에 담아왔다. 1972년 한국미술협회에서 주관한 첫번째 앙데팡당전이 당시 경복궁 현대미술관에서 있었다. 그는 청홍의 둥근형태와 그것을 포근하게 감싸는 검정선 등 태극기의 남다른 조형미와 그에 깃든 태극사상에 심취해 있던 때였다. 그것을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었는데 당시 서슬이 퍼런시절에 태극기를 이용한 설치미술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시절인지라 주최측에서 급기야 작품을 철거하기 시작했고 사상불온자<태극기모독죄>라는 의심을 받게된 것이란다.


이처럼 태극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쏱았던 김화백은 요즘도 태극기에 대한 이야기거리가 있다고 하면 그를 찾는 기자나 PD들이 많다고 한다.
1946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김화백은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주목을 받던 전도유망한 청년작가였다. 고향인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에도 큰 미술대회마다 모든 상을 휩쓸다시피해 당시에 타학교의 미술교사들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현재도 김화백은 그림에 관한한 그의 발상이나 접근법부터 남달라보였다 표현주제나 기법도 매우 변화무상했다. 그는 한 때 1천점의 얼굴을 그려 화제를 모은적도 있다고 했다.
그를 오랫동안 보아온 한 미술평론가는 “김명수가 전시회를 한다”고 하면 이번에는 또 무엇을 들고 나올까 궁금하다는 글을 쓰기도 했단다.
절친한 친구가 상주(喪主)가 되었을때 장례 후 친구가 몸에 걸쳤던 상복에 그림을 그렸던 괴짜화가 바로 김명수 화백이다.

“문화예술 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곳이 바로 안성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지만, 현재 지역민들의 배타적습성 때문에 작품전시 등을 일체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이곳 안성에서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하면서 그가 현재 살고있는 마을을 태극기를 이용한 태극기 마을로 탈바꿈하여 국내최초의 태극기 마을을 만들자는 꿈을 가지고 몇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김화백은 가슴 속에 한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그꿈을 실현 시키겠노라고 했다.
그가 안성 남풍리 산속에 들어와 산것은 1999년쯤. 그는 지금도 항상 문패처럼 태극기를 옥상에 걸어 놓은채 살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나무도심고 꽃도 가꾸어 가며 아름다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고립되기도 하고 여름이면 산짐승이 심심찮게 나타나 부부를 놀라게도 하지만 그는 한번도 적적하거나 무서워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김화백에게는 생명과 같은 그림이 있고 아내(이옥자여사)에게는 김화백이 늘 함께하기 때문이다. 아내 (이옥자여사)는 같은 대학 후배였는데 결혼 후 김화백과 함께 평생을 친구 같이 지내고 있다고 한다.
김화백은 현재 지체장애4급이다. 그는 왼쪽다리에 장애가 있어 걸음 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미술작품 세계는 아내와 태극기가 평생 곁에 두어야할 소재인 것 같다.
최근에는 6월의 태극응원 물결에 어릴적 딱지를 결합시킨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사과,구름바위,태극기 등이 등장하는데 요즘은 사진을 결합시킨 퓨전작품에 몰두해 있다고 한다.
너무 앞서갔기에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화가 김명수 화백.
그의집 옥상에는 아직도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단호하게...그러나 자유롭게...
박우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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