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와대 게시판에는 촌각을 다투는 소방차 출동에 방해가 되는 불법주차 차량을 소방관이 밀어도 책임 안 지게 해달라는 청원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각종사고를 복기해보면 그 밑바닥에 남는 것은 기본과 상식의 붕괴다. 불쏘시개가 된 가연성 외장재, 비상구를 막은 불법 적치물, 제 구실 못하는 소방점검, 기민한 대응 미숙, 소방장비 부족 등 온통 부실과 불법 투성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도로 곳곳을 점거하고 있는 불법주차 차량들이다. 이 같은 차량들 때문에 현장을 코앞에 두고도 우회하느라 피해를 키운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법주차는 2015년 의정부 화재 2010년 부산 해운대 화재를 비롯한 각종 참사에서 빈번하게 되풀이된 사안이었다.

소방차의 골목 통행을 쉽도록 하자는 취지의 법안은 이미 국회에서 편하게 주무시고 계신지 꽤 됐다. 결국 국회가 골든타임을 지키지 않은 꼴이 됐다. 또, 제천 화재사건과 같이 건물 내부에 불법 적치물이 비상구를 막아 인명 피해를 키운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중이용시설의 비상구는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골목길 불법주차나 비상구 확보와 같은 인명피해와 직결되는 사안은 강력한 규제로 근절시켜야 한다. 소방점검관련 법률도 정비가 시급해 보인다. 광역 시·도의 손실보상을 규정하는 소방기본법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소방 관련 시설 주변을 주정차특별금지구역으로 정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 역시 국회에서 낮잠중이다. 오죽하면 불법주차 차량을 소방차가 밀어버리게 하자는 청원이 빗발치겠는가. 안전 법규와 예산을 홀대한 정치권이 제일 먼저 반성해야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참사가 터지면 상대방 흠집만 들추는 정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치권 책임이 거론되는 이유다. 12월 임시국회가 개헌 특위 활동기간 연장과 관련한 여야의 다툼으로 단 한 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한 게 단적인 사례다.

미국, 영국 등은 소방차가 통행에 방해되는 차를 부수며 현장에 진입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견인차를 불러 치워야한다.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어서다. 정부는 불요불급한 선심성, 전시성 예산을 줄이고 소방 당국이 손해배상 책임을 면책하거나 국가가 대신 감당해주는 제도를 서둘러 도입하고 적재적소에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오죽하면 소방관들도 건들면 손해라며 무리한 진입을 꺼리겠는가.

이웃 일본은 불법주차 과태료가 우리나라의 3배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은 불법 주차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선진국 중에는 다중이용시설이 밀집한 지역엔 차가 아예 들어서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불법 주차는 시민 준법의식 미흡과 고질적 주차 공간 부족이 합쳐져 생기는 문제다. 우리나라는 통계상으론 주차장 보급률이 94%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주차 공간이 대부분 아파트나 도심 대형 빌딩에 편중돼 있고 중소형 건물과 다세대·다가구주택 지역은 턱없이 부족하다.

공공기관·종교시설·은행 등의 부설 주차장 개방, 공원·학교운동장의 지하 공영 주차장 건설, 대형 건물 옥상 주차장 규제 완화 등 대책이 시급하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로 결국 늘어나는 것은 불법주정차 차량들이다.

정부는 적폐청산을 수개월째 외치며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생명과 재산피해의 주범인 불법주차 차량 근절이야 말로 진정한 적폐청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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